“누구한테 팔았는데?”
모래는 계산대에 손을 짚었다. 병 속의 노을이 흔들렸다. 회색 앞치마 소년은 장부를 덮었다.
“손님 이름은 말하지 않아. 여기는 잊힌 시간을 거래하는 곳이니까.”
“우리 동네 아침도 잊힌 시간이야?”
“누군가 안 돌아오길 바라면 그렇게 돼.”
포실이 소년의 모자에 내려앉았다.
“그럼 이름 말고 영수증을 보여 줘. 배달 주소는 비밀 아니잖아.”
소년은 구름을 떼려다가 포기했다. 손가락이 그대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모래가 숟가락으로 종이를 누르자 글씨가 나타났다. 북쪽 둑, 문 없는 집. 가격은 기다림 열한 해.
“열한 해를 낸 사람이 있다고?”
“기다린 걸 내는 거야. 앞으로 기다릴 걸 내는 게 아니고.”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비음이라고 했다. 가게를 지키는 대신 아직 이름을 잊지 않을 권리를 받았다고 했다. 모래는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천장의 종이 한 번 떨렸다.
비음이 서둘러 계단을 가리켰다.
“가게가 닫혀. 아침을 가져가려면 값을 돌려줘야 해. 훔치면 동네의 다른 시간이 빠질 거야.”
“나한테는 열한 해가 없는데.”
“누구나 기다린 게 하나쯤 있어. 얼마나 오래인지보다 얼마나 돌아보는지가 중요해.”
모래는 그 말을 봉투 속에 접어 넣고 싶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은 누름에게 가져가면 조금 쉬워졌으니까.
북쪽 둑으로 가는 길에는 검은 돌들이 박혀 있었다. 늘 지나던 길인데 돌마다 작은 발자국이 빛났다. 숟가락을 들고 있을 때만 보였다.
“이건 뭐야?”
“돌이 기억하는 걸음.” 포실이 대답했다. “많이 돌아온 사람일수록 깊어.”
모래의 발자국은 얕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을 생각하자 옆에 작은 신발 자국이 생겼다. 오래전 자신이 어머니를 마중 나가던 길이었다.
둑 끝에는 지붕만 낮게 솟은 집이 있었다. 창문도 문도 없었다. 벽 앞에 서 있는 노인은 빈 찻잔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차 마시러 왔니?”
“여기는 어떻게 들어가요?”
“들어가지 않아. 나올 사람을 기다리는 집이거든.”
노인의 이름은 이듬이었다. 그는 하루에 찻잔을 두 번 씻는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이 쓰고, 다른 하나는 돌아올 동생을 위해서였다.
“동생이 종지기였어요?”
“아니. 다리 놓는 사람이었지. 강 건너로 간다더니 길이 달라져 버렸어.”
모래는 어머니의 편지를 떠올렸다. 길이 달라졌다는 문장이 마지막 줄에도 있었다. 그때는 기차가 돌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이듬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안에는 붉은빛과 노란빛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병에 손을 대자 배가 고파졌다. 아침이었다.
“그걸 돌려주셔야 해요. 동네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해요.”
“알아. 그래서 기다리고 있지. 이것만 있으면 길이 열리거든.”
“누구의 길인데요?”
노인은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벽이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좁은 골목이 비쳤다. 골목 끝에는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서로 다른 짐을 들고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모래는 초록 목도리를 알아봤다.
“엄마?”
벽 안쪽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오지 않았다. 모래는 벽에 귀를 댔다. 차가운 돌의 감촉만 남았다.
“종이 울려야 돌아와.” 이듬이 말했다. “그런데 종지기가 길을 닫았어. 누군가 기다림을 내려놓아야 열린대.”
“그럼 아침을 사지 말고 종을 치면 되잖아요.”
“옛 종지기가 그랬어. 한 사람을 보내면 한 사람을 돌려보낼 수 있다고. 난 누구도 대신 보낼 수 없었어.”
포실의 몸이 작아졌다. 알고도 숨긴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모래는 병을 보다가 벽 안의 어머니를 다시 봤다. 어머니는 두 손을 크게 벌렸다가 천천히 모았다. 어릴 때 길을 잃으면 하던 신호였다. 움직이지 말고 나를 보라는 뜻.
모래는 숨을 고르고 숟가락을 벽에 댔다. 작고 맑은 소리가 났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 글자씩 흘러나왔다.
“바꾸지 마.”
“엄마, 어떻게 돌아오는데?”
“종지기에게 물어. 한 사람이 아니야.”
빛이 흐려졌다. 이듬이 병마개를 눌렀다. 아침을 오래 열어 두면 자신의 기다림이 모두 사라진다고 했다.
모래는 노인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 아직 내일이 올지는 몰랐지만 약속을 하지 않고 떠날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 포실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모래가 종탑을 가리켰다.
“네가 길을 잃었다고 했지. 사실은 거기서 도망친 거야?”
포실이 어깨에서 내려왔다. 작은 구름 한가운데에 금빛 열쇠가 떠 있었다.
“나는 종지기의 마지막 조각이야. 나를 돌려놓으면 네 어머니의 이름부터 잊게 될 거야.”